사운즈 한남 2022

흐르다

일 년 열두 달, 사계절을 일상 속에서 직관적으로 느낌이 오는 순간을 포착해왔다. 디지털상에서 이미지 안의 각기 다른 색을 스포일러로 찍어 의식하지 않은 컬러값을 기록하고 저장했다. 보이 지 않는 씨앗을 심듯이 그 시간과 기억을 함께 기록하고 긴 시간 묵히기도 하다가 꺼내어 그때 기억을 더듬어 연상하기를 반복하면서 이미 내가 오랜 시간 해온 편린들을 그 색판에 얹는 작업 을 하기 시작했다. 거꾸로 그 색판을 모티브로 색상값을 저장하고 자료를 정리해서 새로운 디자 인에 영감을 받고, 뜻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인위적인 것이 아니고 천부적인 아름다 움의 발굴 같은 것이었다. 디자이너로서 의도한 유행에 맞춰 물건을 만들고 공간을 최신 트렌드 의 장소로 거듭나게 하는 직업을 가진 나에게 트렌드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열쇠처럼 여겨져 왔 다. 매년 유명 트렌드 회사의 자료를 구매해서 작업에 적용했었다. 그러나 2015년 무렵부터 색상 판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그보다 더 자연스럽고 매력 있는 아름다움에 갈등이 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각적 이미지에 연상되는 기억과 시간을 기록해서 스스로 색상판을 만들고, 그 위에 시 각과 촉각을 연결하는 편집을 시도했다. 이미지는 일반 상품처럼 트렌드의 지배하에 대량생산과 짧은 용도의 수명을 갖게 되며 예술적인 유희의 수단이 되어버린다. 단순히 자연의 이미지가 아 니라 자연에서 얻어진 소중한 자원에서 비롯된 지극히 천부적인 아름다움을 바탕으로 촉각적인 근접을 할 수 있는 재료의 물질성과 색과 질감이 공간의 빛과 작용하는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이 시작되었다. 질감과 물성과 사용한 기술과 공간의 밀도와 물성을 가진 빛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고 영향을 미치는 재료들을 색의 상징과 역사, 전통의 의미를 담아 분리하고 연결하는 작 업이 다른 차원의 시공간을 중첩하면서 더욱더 깊은 내러티브를 만들어갔다.

장소와 시간에 따라 같은 재료도 다른 빛깔을 내게 되고 그것을 바라보고 느끼는 사람마다 받아 들이는 색상값은 다르다. 그것은 그들이 가진 시각과 편견, 또는 상식에 의해 다른 반응을 하게 된다. 그들이 연상하는 기억의 온도는 다소 다르더라도 그것들이 묵시적으로 지니고 있는 고유의 아름다움은 누구에게나 유사한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브랜딩의 밑 작업으로 이러한 아카이브를 적용하고 프로젝트에 활용하면서 데이터를 편집하고 북 바인딩으로 촉각적인 기록을 시작했다. 편집된 아카이브북 안에 자연의 이미지, 색상판, 컬러값과 그러한 기억을 연상하게 하는 시공간의 이미지, 그것을 설명하는 텍스트와 패턴들로 완성되고, 아울러 해당하는 벽지나 페브릭 등 재료 를 넣어서 촉각적 경험을 하도록 했다. 이러한 자원을 바탕으로 무수한 적용을 해볼 수 있고, 이러한 작업을 통해 간접적인 <차경>을 하게 되는 결과를 발견하고 놀라웠다.

연결성 없는 이미지의 폭격 속에서 동일시된 취향과 미의 척도가 미간의 눈으로 자연을 바라보고 스스로 촉각적인 경험을 통해 훈련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취향을 되찾게 되기를 바라며 이 전시의 문을 활짝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