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예의 발견 - 열화당 책 박물관 2018

뜻그림 민화를 오늘에 살리는 일

장응복 무늬 디자이너

열화당의 책을 사랑해 온 나는 얼마 전 열화당책박물관을 방문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한국의 민화, 도자기, 문인화, 궁중문화를 비롯해 한국의 자연과 건축 등을 소재로 작업을 해 왔고, 최근에는 1986년부터 2016년까지의 패턴 작업을 모아 『무늬(Mooni)』(그루비주얼)라는 책도 출판했던 터라, 다양한 옛 문화를 기록한 책을 내는 열화당의 방문은 무척 흥미로웠다.

1980년대는 물론이고 최근 2000년대까지도 옛 문화를 제대로 정리한 전시나 연구를 접하기 쉽지 않았다. 그러니 한정된 문헌이나 몇몇 수집가의 진품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을 했었다. 대원사의 ‘빛깔있는 책들’ 시리즈, 박물관의 전시도록, 장안평(長安坪) 고미술상가의 물건들이 주된 자료였다. 가회박물관의 윤열수 선생님의 민화 병풍이나 한국자수박물관의 허동화 선생님의 규방 공예품들은 특히 지배적인 영향을 주었다.

목가구와 도자기, 그 중에서도 단아하고 모던한 조선 후기의 고미술을 조금씩 수집하면서 직접 만지고 느끼게 되었고, 사진으로는 미처 알지 못한 그 아름다움에 더욱 빠져들었다. 소반(小盤)의 조형이나 다완(茶碗)의 순수하고 풍요로운 선과 질감과 빛깔…. 처음 접한 지장(紙欌)인 관복장(官服欌)을 사들인 날은 그 앞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마냥 바라보았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에는 고미술을 실생활에 적용해 보는 일을 했다. 고미술 그대로 사용하기도 했지만 현대화하는 작업을 시도했고, 매년 두 번의 프로모션을 통해 그 용도를 검증하고 실험했다. 하지만 이 일은 지금까지도 쉽지 않다.

미학자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 1905-1944)은 한국예술의 고유한 특성이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이라 했고, 미술사학자 김원용(金元龍, 1922-1993)은 가능한 한 인공의 흔적을 줄이고 자연과의 조화를 찾았다는 점에서 ‘자연주의’를 특징으로 꼽았다고 철학자 조요한(趙要翰, 1926-2002)은 『한국미의 조명』에서 서술했다.

고미술을 디자인 작업에 적용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은, 그 고유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손상하지 않으면서 마치 패턴처럼 일정한 형식의 틀에 조화롭게 넣는 일이다. 오늘의 대중이 우리 문화를 실생활에서 누리고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타협해야 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현대인이나 서양인에게는 ‘비균제성(非均齊性)’의 우리 문화보다 좌우대칭이 깔끔한 일본문화가 이해하기 쉬울지 모르겠다. 가끔 외국인이 한국 문화가 일본과 중국의 문화와 무엇이 다르냐고 물으면, 나는 세 나라의 정원문화를 예로 들어 설명하곤 한다. 일본은 집안에 축소된 미니어처 가든을 인공적으로 꾸미고, 중국은 대담한 형태와 크기로 화려하게 정원을 조성하지만, 한국은 풍경이 아름답고 풍수지리가 좋은 곳에 정자를 지어 가공하지 않은 대자연 그 자체를 감상했다고. 확연히 다른 차원의 교감이다. 우리 미술의 ‘비균제성’을 두고 혹자는 미완성, 만들다 만 것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획일적으로 형식에 맞추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신나면 신나는 대로, 늘리기도 오르내리기도 하는 우리 정가나 가요 같은 것이리라. 무심하게 남은 천으로 이어붙인보자기가 ‘포스트모던’으로까지 평가받고, 해학과 대담함이 묻어나는 생활 속 민화가 이제는 조형미술로 자리잡기도 한다. 나는 이러한 ‘민예의 정신’이 우리 생활 안에 신명으로 살아남아 도원몽(桃源夢)을 꿈꾸게 되길 소망한다. 바라보기만 하는 미술품이 아니라 우리 생활에 스며들어 실용의 멋과 운치를 더하고 인공의 흔적을 줄이고 있는 그대로의 한국미를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것이 실현되려면 공예의 기술이 전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지혜를 지속가능한 가치로 전환해야 한다.

최근 열화당에서는 대갈 조자용 선생의 민화에 대한 글을 모은 『민화란 무엇인가』를 영혼도서관 시리즈로 출간했다. 사실 조자용은 우연히 김홍희 전 서울시립미술관 관장님에게 받은 에밀레박물관 영문 도록을 보고 처음 알게 되었고, 이후 좀 더 관련 자료를 찾아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제대로 알지 못하니 답답했고, 머리로는 알지 못해도 가슴으로는 늘 느끼는 무언가를 함께 이야기 나눌 사람이 그리웠다. 그러던 차에 열화당책박물관에서 조자용의 『민화란 무엇인가』를 꿈같이 다시 만났고, 집으로 돌아와 단숨에 읽어 내렸다. 얼마 후 열화당책박물관 다음 전시로 민예 관련 문헌전을 기획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민예를 근간으로 한 나의 작업을 책 공간 속에 함께 전시해 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서둘러 작품을 설치하면서 옆에 놓인 새로운 책들을 보니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더 많다는 생각이다. 살아 숨 쉬는 듯한 민예 자료들과 그에 대해 다정하게 이야기해 주는 무수한 글들이 나를 매료시키고 있다. 만화방을 드나드는 아이처럼 요즘 열화당책박물관을 방문하는 재미가 여간하지 않다.

우리는 예부터 벽장문, 돈 괘, 병풍에 소원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담아 그려 넣었고, 이 같은 민화를 통해 염원이 실현된다고 여겼다. 조자용은 이렇게 말했다. “상징화로서의 민화는 뜻그림, 다시 말해서 민간신앙적인 뜻이 담긴 그림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낯선 그림을 대할 때 곧 그 그림의 뜻을 묻는다. 철학적인 뜻도 아니고, 화론적인 뜻도 아니며, 평범하고 속된 뜻을 찾고 있는 것이다. 송학도(松鶴圖)는 오래 산다는 뜻, 모란도(牡丹圖)는 부귀의 뜻, 석류(石榴) 그림은 자손이 많다는 뜻, 약리도(躍鯉圖)는 출세한다는 뜻과 같은 민간 상징관으로서 만족하며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한민화서론」) 내가 『무늬』에서 언급한 것처럼, 무늬는 응축된 힘을 품고 있어 좋은 뜻을 이미지 언어로 공간에 기운생동하게 한다. 소박하면서 아름다운 뜻을 무늬에 담아 우리네 풍요로운 삶을 되찾게 하는 일이 지금 나의 ‘민예’가 아닐까 한다.

장응복은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섬유공예과를 졸업했다. 1986년 모노콜렉션을 설립해 한국인의 정서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하는 텍스타일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다. 2000년부터 하임텍스타일과, 베트남과 모로코, 중국 등에서 호텔프로젝트에 참여하고, 2008년에는 프랑스의 로쉐 보보아(Roche Bobois)와 함께 작업하는 등 국내외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또한 2005년 모리미술관, 2010년 아트링크, 이도 갤러리, 2012년 메종 오브제, 2013년 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 광주비엔날레 2014년 통의동보안여관, 2015년 프린트베이커리 등의 전시를 통해 디자인의 영역을 넘어선 작가로서의 활동도 함께하고 있다.